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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홍 교수의 군산 곳곳 역사탐험- 서수면 출신 독립투사 김영현 선생

2022-08-03 11:34:08

 

 


독립투사 김영현 선생은 1907년 3월 29일 서수면 서수리 61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용석 공의 6남 3녀 중 2남이다.

유년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임피보통·전주고등보통학교 졸업후 당대 수재들이 운집하던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선생을 포함한 수원고농 합격자 명단은 ‘조선신문’(1926년 4월 5일자)에 게재되어 있다.
묘비에는 ‘자기 한몸 영달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유독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의협심이 강한지라 여기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계몽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새겨져 있다.

그러나 수원고농 재학 중 항일구국운동을 해 반일사상이 농후하다며 1928년 9월 3학년 퇴학을 당했다. ‘조선일보’(1928년 10월 4일자)는「수원고등농림학교 ‘비밀결사사건’으로 임과(林科) 김영현 등 5명을 퇴학 처분 하였다.」고 보도했다.

사건 배경은 ‘옥구소작쟁의사건(옥구농민항일항쟁)’으로 비화한 서수청년회와 농민조합 활동으로 추정된다. 선생은 수원고농 2학년 재학시 1927년 8월 3일 서수청년회 창립 의장(21세)에 취임했다. 그 때 서기로 취임한 장공욱(이명 장태성)은 선생의 전주고보 2년 후배였다. 성황리에 개최된 서수청년회는 농민운동 지지에 관한 건 등 강령규약 발표와 결의가 있은 후 만세삼창으로 폐회했다. 두 사람은 서수청년회를 함께 창립하고 조직화하는데 헌신했다. 청년회 활동은 창립 3개월 후 서수에서 발생한 ‘옥구농민항일항쟁’에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8월 19일 서수청년회 주최, 서수농민조합 후원으로 ‘농촌문제강연회’를 개최할 때  일경이 이를 제지했다. 이에 맞서 항쟁한 농민의 구체적 실상을 동아일보(1927년 8월 24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8월 19일 청년회의소 강연회와 농민간담회를 개최전에 미리 보고했는데 18일 군산경찰서장이 서수주재소에 와서 농민조합 김영준(선생의 큰형)에게 “서수농민조합은 집회 금지가 되었으니 간담회를 절대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영준이 “서수청년회 주최 강연회만은 허가해야 한다”고 하자 “원고를 경찰서에 제출했느냐” 하므로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러면 그것만 허가하니 출석경관 입회하에 하라”고 하므로 하등의 염려 없이 예정과 같이 개회했다. 그러나 돌연히 출석경관으로부터 “원고의 허가 없는 강연회는 절대 허가할 수 없으니 해산하라”고 하므로 쌍방이 논쟁이 일어나 강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백여 군중이 주재소까지 쇄도하여 금지의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라고 강박하므로 주재소 순사 시목(?木)은 자전거로 임피읍우편소에 가서 전화로 군산경찰서에 응원을 청하여 순사 3인이 오후 3시차로 서수에 왔다. 수백여 군중은 의연히 주재소를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순사들은 농민조합 집행위원 김재풍 외 1인은 주재소에서 풀어주고 3인(김영현, 김영준, 장공욱)은 “서장과 담판하기 위해 본서까지 가자”고 하여 군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임피역으로 갔다. 군중들은 임피역까지 가서 경찰의 횡포를 꾸짓고 언론의 자유를 절규하면서  “서수농민조합 만세, 서수청년회 만세, 세계무산자 만세”를 외치며 임피역에서 작별을 했다.」

 3인은 군산경찰서에 가서 고등계주임의 검속선언으로 구금되었다가 다음날 저녁에 방면되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경찰서에 가니 형사실에 넣어놓고 고등계주임 서수주재소 시목순사와 양 형사가 열석(列席)하여 큰 죄인이나 잡아다 놓은 듯이 고등계주임은 경찰이 금지하는 강연회를 왜 하려고 하느냐고 위협했다. 또 시목순사는 서장이 서수주재소에 왔을 때 자기가 들었지만 결코 강연회를 허가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서장이 허가한 것을 당신들이 금지한 것이므로 당신들과는 말할 필요가 없으니 서장을 면담할 뿐이라고 했다. 고등계주임의 명령으로 검속 되었다가 다음날 서장과 면담하여 전후 사실을 말하자 서장은 “강연회는 허가했으나 임석경관이 금지하는데 왜 하려 하느냐. 순사의 말은 곧 서장 자신의 말인데  왜 반항했느냐” 는 등 횡설수설 했다.」

경찰에 연행된 서수농민조합 집행위원 김영준(23세), 청년회 집행위원 겸 연사 장공욱(19세), 연사 김영현(21세) 세 사람은 다음날 8월 20일 오후에 석방되었다. 그들의 서수청년회 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1월 ‘옥구농민항일항쟁’이 일어나기 20여 일전까지 농민조합 서수지부 임시총회 개최(1927년 11월 9일)는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선생을 중심으로 장공욱, 김영준 등의 농민지도자들과 서수농민들이 치밀하게 뭉쳐 일으킨 독립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농민지도자들이 서수청년회와 농민조합 등의 조직화 및 야학과 계몽운동을 이끌며 농민들의 항일 의식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소작쟁의’를 독립운동으로 승화했다고 평가된다.

선생은 퇴학처분 된 후 1928년 12월 만주로 망명해 돈화현에 있는 항일독립군에 투신, 군자금 조달과 무기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4년 후 1932년 7월에 독립군 동지들과 합세해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 일경과 교전하다 다리에 심한 총상을 입고 원통하게도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일경은 1933년 12월 청진지방법원 예심에서 선생에게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었고 대전, 마포, 서대문, 함흥 등지의 형무소를 전전하며 복역했다.

체포 당시 조선중앙일보(1933년 11월 28일자)는  「…검사는 1932년도부터 간도일대에 적화를 획책하고 20여 회 테러 행동을 감행하여 일시 소동을 일으켰고 간도영사관 천우 순사를 살해한 이원갑, 김영현, 이주봉에게 무기징역, 허장욱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그후 재판부는 이주봉 무기징역, 이원갑 징역 15년, 김영현 징역15년, 허창욱 징역 8년으로 감형, 언도했다.」 고 보도했다.

선생이 체포되어 공판에 회부될 때 주소는 ‘중국 연길현 용정촌 제1구 우장리’로 기록되어 있었다. 선생은 조국광복을 불과 1년을 남겨둔 채 투옥생활 12년 3개월 만인 1944년 3월 12일 함흥형무소에서 옥중 고혼이 되셨다. 선생의 제적등록부에 따르면 순국 시각은 3월 12일 오후 7시로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주소는 함흥부 일출정 35번지로 되어 있지만 이는 선생이 복역했던 함흥형무소 주소일 것이다. 일경이 선생에게 ‘사실대로 영사관 습격의 배후를 밝히면 감형을 해주겠다’고 고문과 회유를 했으나 선생은 끝까지 함구했다고 한다.

광복 후 1946년 선생에게 수원고등농림학교 명예졸업장이 수여되었고 1986년 12월  독립유공자로 확인되어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묘는 서수면 축동리 보천동 산 148번지 선영에 모셔져 있다. 선생은 조국 광복을 위해 젊음을 불태우다 26세에 체포되어 38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고혼이 되신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순국선열이시다.

 711번 지방도로변 서수 보천사 입구에는 묘소 진입을 알리는 안내표지판 하나 없어 쓸쓸하기만 하다. ‘독립투사 김영현 선생 묘 입구’를 표시하는 이정표를 건립해 선생의 애국적 단심을 새기도록 하자.  



군산미래신문 (km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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