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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홍 교수의 구석구석 군산 읽기]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과 대마도 압송도

2022-06-01 14:51:10

 

 


           
 2019년 초가을 청양군 백제문화예술박물관을 찾아 ‘면암 최익현 초상’과 ‘대마도 압송도’를 관람했다.

뜻밖에 박물관 학예사로부터 “군산 한약방 주인 장 씨에게서 두 소장품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소 막연한 정보였지만 작품의 전 소장자를 찾게 되면 소장 동기를 알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실제로 독립운동가 습재 최제학이 쓴 <습재실기>에는  ‘...호암 장진욱에게 맡겨 봉안하게 했다’는 사료가 담겨 있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 같았다.

군산에 돌아온 나는 ‘성이 장 씨인 한약방’을 찾아 나섰고 이틀 만에 중일한약방 장희옥 원장를 만나게 되었다. 또한 그가 호암 장진욱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품을 팔고 수소문해서 얻은 값진 소득이었다. 장 원장으로부터 그의 선친 장인수가 조부 호암으로부터 두 소장품을 물려받았다는 그간의 유래와 경위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습재실기>에 따르면 습재 최제학(1882)과 호암 장진욱(1866)은 진안 출신으로 면암 선생이 정산(현재 청양)에서 강학할 때 동문수학한 벗으로 1906년 병오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창의를 할 때 동참을 했다.

습재는 호암보다 열일곱 살이 아래지만 두 사람의 교분은 매우 친밀해서 습재가 면암 선생을 모시고 의병창의를 준비할 때 호암은 가산을 처분해 군량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고 모병에 앞장을 섰다. 특히 호암은 의병 거사 직전에 일경의 눈을 피해 면암 선생이 진안 삼우당에 은거할 때 습재의 조카 최경상과 함께 면암 선생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좀더 일찍이 장 원장을 만나 ‘면암 초상’과 ‘대마도 압송도’를 지킬 수 있었더라면 면암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돈헌 임병찬 의병장을 함께 모시는 사우(祠宇) 건립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청양군 고위급 인사가 소장자 장 원장을 찾아와 설득해 소장품을 매입해 갔다니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전시할 주요 사료로서 애착을 느낀 것 같다. 

<습재실기>의 ‘묘지명(墓誌銘)’에는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서 순절 후 습재 최제학이 ‘면암 초상’을 그리게 하여 간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습재는 정산군수를 지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석지 채용신(1850-1941)이 전북에 머물 때 면암 영정 2본의 제작을 의뢰했다.

습재 이야기로는 “하나는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남은 하나는 분실을 우려한 나머지 절친 호암에게 봉안을 부탁했다”고 하였다. 습재와 호암 두 사람은 장차 광복이 되면 진안에 있는 습재 본가의 삼우당 터에 영당(靈堂) 건립을 다짐했다.

습재는 일경의 요주 인물로서 수시로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호암이 소장품을 간직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서슬이 퍼렇던 시기에 호암은 스승의 초상을 봉안하지 못한 채 광복 전에 운명(1934년)했다. 습재 역시 광복 후 운명(1959년)했으므로 두 사람은 스승의 영당 건립의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호암은 생전에 아들 장인수에게 자신이 죽은 뒤라도 반드시 영당 건립을 유언했다. 호암 운명 후 아들 장인수는 진안에서 군산으로 이사해 중일한약방을 운영했다. 장인수 역시 광복 후 사회혼란, 한국전쟁 등으로 여의치 않자 선친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현재 호암의 손자 장영표가 부친이 개업한 ‘중일한약방’을 이어가고 있다. 

1910년-1930년대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두 소장품은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석지 채용신이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면암 선생의 풍모와 역사적 사실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청양군은 두 작품을 충남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후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면암 초상’은 문화재로 지정(충남 유형문화재 제248호)되었고, 규격은 전체 144.5 × 63.8cm, 그림 111.0 × 53.8cm 이다.  

  ‘대마도 압송도’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기록화이다. 면암 일행이 숭례문을 나올 때부터 대마도에 도착하는 압송 과정을 한 장의 비단에 절반씩 나눠 정교하게 그렸다. ‘대마도 압송도’ 역시 문화재로 지정(충남 유형문화재 제249호)되었고, 규격은 전체 120.5 × 63.3cm, 그림 91.0 × 53.8cm 이다. 면암 선생이 경성을 떠나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대마도로 압송 과정을 재현한 기록화 구성이 비탄스럽다. 

  ‘대마도 압송도’의 좌측 그림은 일본인이 끄는 인력거를 탄 면암 선생 뒤에 임병찬과 그의 아들 임응철, 동생 임응대가 보인다. 그리고 면암 선생의 장남 최영조, 차남 최영학을 비롯, 최제학 형 최제태, 최영설, 최만식, 최전구, 이승회 등 10명이 따르고 각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과정이 한 눈에 보인다.
 
‘대마도 압송도’의 우측 그림은 부산 초량역에 기차가 도착해 부산항에 이르러 최익현과 임병찬이 조각배에 올라 일본 상선으로 옮겨 타기 전 오륙도를 거쳐 대마도로 향하는 모습이다. 

  두 작품을 그리게 한 습재 최제학은 면암 선생을 도와 태인의병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그가 면암 선생과 함께 순창에서 진위대에 붙잡혔을 때 그의 나이는 25세로 ‘순창의 12의사’ 중 가장 어렸다. 예로부터 ‘면암이 없었으면 습재도 없었고, 습재가 없었으면 또한 면암도 없었다.’고 전한다. 습재는 경성의 일본군사령부에 압송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룬 후 대마도에 이수(移囚)된 스승 면암을 방문했으나 며칠 후 스승이 순절하자 반구 행렬에 참여했다. 

  그 후에도 습재는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다가 수감당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해 협력하려다가 또다시 구속되는 등 탄압받았다.

습재는 지리산 청암면 청학동에 칩거하며 가난에 시달리다 스승의 영당 건립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 채 운명(1959년)했다. 정부는 습재의 항일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포상했다. 

  습재의 절친 호암 장진욱은 진안출신 의병으로 분류되었지만 거증자료 미비로 그동안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장 원장과의 인연으로 필자가 2019년 12월 ‘군산문화’에 발표한 논문 ‘면암 최익현 선생의 초상과 대마도 압송도에 관한 고찰’을 바탕으로 거증자료를 준비했다. 

 2021년 1월 12일 국가보훈처에 호암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국가보훈처는 2021년 11월 2일 호암 장진욱의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을 결정했다. 정부는 2021년 11월 17일 ‘제82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호암 장진욱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표창’을 포상했다.



군산미래신문 (km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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