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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홍의 군산읽기] 지경 출신 독립운동가 이순길 선생

2022-01-03 10:37:35

 

군산·전주 만세운동 주도, 혈성단애국부인회 참여

 

기민하고 용의주도하게 일경 피해 독립운동, 2019년 대통령 표창



편집자주
: 지역의 역사와 인물, 자연을 연구하는 향토사의 가치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역 소멸 위기가 심심치 않게 언급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 지역을 더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는 일은 이 향토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과 맥을 함께 합니다.

오랜 기간 향토사 연구에 몰두해온 최규홍 군장대 명예교수이자 사료조사위원이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그동안 비교적 덜 알려졌던 우리 지역의 인물과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싣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순길(李順吉)은 1891년(개국500년) 3월 15일 전주이씨 이양화와 삭녕 최씨 사이에 대야면 지경리 707번지에서 태어났다. 이순길 위로 오빠 이용재가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이요한, 남동생 이요순, 여동생 이순애가 있었다.

첫째 남동생 이요한은 1899년 3월 10일생으로 해방 후 독립촉성회 지역회장을 발판으로 1948년 6월 9일 군산(옥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인물이다. 그는 1952년 7월 자유당 도당위원장을 지낸 그 여세로 9월 17일 전라북도 도지사가 되었다. 도지사로 발탁이 된 것은 해방직후 조선여자국민당 대의원이었던 이순길의 후광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남동생 이요순은 1902년 2월 15일생으로 1926년 2월 10일 영명학교 재학 시 일본선생 거부와 동맹휴학으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고창고보에 1926년 4월 1일 재입학했으나 다음해  일어시험 거부와 동맹휴학을 하여 11월 9일 제적당했다.

그 후 이요순은 서울 경신학교에 편입했고 졸업 후 세브란스의전에 입학(1932년 4월 1일)했다. 그러나 고창고보 재학 중에 있었던 일경의 모진 고문과 폭행 후유증으로 만성 지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의전 3학년 재학 중 1934년 10월 1일부터 1937년 3월 30일 까지 병기(病氣) 휴학을 하다가 의사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37년 5월 폐결핵으로 사망을 하였다.

이순길은 4살 젖먹이 때 눈이 몹시 아파 그녀의 어머니가 드루 의료선교사에게 데려가 치료를 받았다. 당시 조선은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 25일까지 고종과 왕세자(순종)가 친일내각이 장악한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어가를 옮겨 피신했던 해였다. 이순길의 부모는 선교사들의 치료에 감사와 감격을 하였고, 전킨 선교사 부인 레이번은 삭녕 최씨 이름을 최매리라고 작명했다.

이순길은 성장해 군산 멜본딘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정신여학교를 졸업(제6회) 하였다. 정신여학교를 졸업 후에는 기전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임영신 등을 가르쳤다. 기전여학교가 일제 탄압으로 축소되자 이순길은 천안의 광산촌 양대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1918년 임영신이 기전여학교를 졸업하자 이순길은 자신이 근무하던 양대학교의 교사로 추천해 함께 교편생활을 했다.

 이순길은 방물장수로 가장해 집에 찾아온 독립운동원과 우연히 조우했는데 그 사람이 부통령이 된 함태영 선생이었다. 이순길은 함태영이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받아 감시하는 형사를 따돌리고 임영신을 전주로 내려보냈고 전주만세운동을 주도하도록 했다. 이순길은 지경으로 돌아와 지경교회 강홍선과 의논한 끝에  3.1운동 전야에 교인들을 모아 놓고 독립선언 정신을 보고하고, 간절한 기도로 모임을 마쳤다. 지경교회사에 ‘기미 3.1 대한독립만세운동에 본 교회에서도 애국기도회를 드렸으며 당시에 강홍선 청년과 이순길 여선생이 투옥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신여학교 백주년 기념사에도 ‘이순길이 3.1 운동시 고향인 전라북도 군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관헌에게 쫓기어 상경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환자로 위장 입원하고 있다가 일경에게 다시 쫓기어 다시 동대문 병원(부인병원)으로 탈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길은 1919년 3.1 만세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결성된 오현관, 오현주가 중심이 된 ‘혈성단 애국부인회’에 참여했다. 이때 이순길은 청주지부장으로서 약 15명의 회원동지와 함께 각 지부를 순회하면서 갹출된 의연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상해임시정부에 송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군산 출신 오현관은 안락소학교와 군산진료소장으로 있던 오긍선의 동생으로 멜본딘여학교를 졸업 후 동생 오현주와 함께 정신여학교(4회)를 졸업하였다.

매일신보는 ‘삼월 일일 소요가 발발한 이래 다수의 예수교도가 구금되자 원래 황해도 재령 예수교 부속 명신여학교의 교사로 있던 오현관과 그 자매로 멜본딘여학교 교사로 있던 오현주와 경성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이정숙 등이 소요사건의 입감자와 그 가족을 구제할 목적으로 사월 상순, 경성에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예수교도로부터 응분의 출금을 구하여 입감자에게 물품의 차입 등에 종사하였는데, 그 후 사월 날짜 미상일에 동지 이순길이 지부 설치의 목적으로 회령, 정평, 군산, 목포, 전주, 광주, 황해도 흥수 지방에 파견하였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이 이순길은 ‘혈성단애국부인회’의 지방통신원으로 활동하며 청주지부장으로서 약 15명의 회원동지와 함께 활약했다. 그 후 기미만세운동으로 체포되었다가 8월 상순에 가석방된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를 재정비함으로써 1919년 10월 19일 신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오현주의 밀고로 1919년 11월 28일 발각되어 조직 인원들이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이때 이순길은 끝까지 피신하여 기소중지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정신 백년사에 따르면 ‘일경의 악랄한 취조는 1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애국부인회 핵심간부들은 나머지 동지들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그리하여 43명의 동지는 불기소처분으로 모두 출감하고 중앙의 핵심간부 9명만이 기소되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등경찰요사 기록에 이순길의 본적이 전북 옥구군 지경역전 만자산이며 통신원으로  나타나 있고, 직업불상, 나이 불상으로 기록되어 있어 용의주도하게 일경의 추격을 피하며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최근 우연히 전주 3.13 독립운동의 주도자 윤건중(9대 농림부장관 역임, 제1대 군산 조선이기공업사 사장) 선생의 둘째 아들 윤필립으로부터 그의 선친이 상해로 망명하기 전 이순길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했다는 사료를 접할 수 있었다.

윤건중이 1919년 12월 하순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기 전 이순길로부터 1만원 등 총 5만원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 김인전에게 보냈다는 사실이다. 군자금 세부내역은 윤건중 1만원을 포함해 이순길(대야) 1만원, 고봉식(동상) 5천원, 오창환(이리) 5천원, 김주태(춘포) 1만원, 은관하(금구) 5천원 총 5만원 이었다. 

  이순길 유족들은 1990년대부터 서훈을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일경의 추격을 따돌리며 기민하게 활약을 했던 여성독립운동가로서 구속을 피하다 보니 객관적 자료의 부족으로 서훈 신청이 좌절되었다. 

  이순길은 해방직후 조선여자국민당 선전부장을 역임하는 등 정부 수립에 많은 기여를 했다. 유족들은 해방후 이순길이 김구 선생을 찾았을 때 그녀를 반갑게 맞으며 김구 선생 자신의 사진에 ‘이순길 여사 혜존(李順吉 女史 惠存)’이라고 친필로 써서 선물한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 

   외손자 정은섭은 2013년 1월 16일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결과 취소청구’를 했다. 외조모 이순길이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 후 기전여학교 등 12년간 교직에 종사하면서 제자 임영신의 애국운동을 지원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부인회에 관여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차례 수행했다’고 주장하였다.


김구 선생이 자신의 사진에 '이순길 여사 혜존'이라고 친필로 써 선물한 것을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서훈공적심사위원회는 ‘이순길이 대한애국부인회활동으로 체포 되었으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일제 검찰에 의해 불기소된 점으로 보아 적극적인 참여여부가 불분명하다고 판단되어 포상보류로 의결하였다’고 답변했다.

 정부는 6여 년을 검토 끝에 이순길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하였고, 2019년 11월 17일 대통령 표창(제221082호)을 하기에 이르렀다.  



군산미래신문 (km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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