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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기분이 매우 좋다.

내가 살고 있는 군산은 바람이 많은 항구도시라 눈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진눈깨비는 삭막한데 첫눈이 함박눈이라 마음이 설레 인다.

첫 눈이기 때문인지 갑자기 거리에 인파가 늘어났다.

나도 덩달아 좀이 쑤시고 마음이 들떠서 책상을 정리하고 일찍 거리로 나왔다.

제법 눈발이 굵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가 꽃잎처럼 나풀거리면서 어깨며 머리위로 내려앉는다.

피하고 싶지가 않다.

온 세상이 하얗다. 언제나 거리가 오늘처럼 깨끗했으면 좋겠다.

어릴 적 고향 마을이 생각난다.

초가 지붕이며 뒷동산 소나무가지까지 소담하게 올라앉아 있던 눈덩이가 춥기는커녕 오히려 포근함을 주었던 것 같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어 진다.

눈이 내리는 길 유리창 넘어 화원에 예쁜 꽃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얀 눈송이 속에 활짝 핀 빨간 장미가 너무나 뇌살스럽다.

한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지금껏은 모르고 살았다.

새삼스럽게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어진다.

그녀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면 어떤 표정일까?

갑자기 집안에서 첫눈을 보지도 못하고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생일을 찾아서 한번도 꽃을 선물한 적이 없다.

주춤주춤 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막 피어난 꽃봉오리들이 나를 반겨준다.

노란 국화도 예쁘고 흰 들장미는 청순하다. 파란 튜립을 만지다가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뽑았다.

그녀의 나이만큼 숫자를 헤어 뽑아들려다 생각하니 꽃다발이 너무 커질 것 같아 망서려 진다.

장미를 내려놓고 하얀 들국화를 꺼내들었다.

흰 눈밭에 흰 꽃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망설이는 내 앞으로 화원의 주인여자가 다가와 생일 선물할거냐고 물었다.

눈이 와서 그냥 꽃을 사고 싶다고 싱겁게 대답했더니 그녀가 웃으며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안개꽃에 흰 들장미와 함께 빨간 장미, 그리고 파란 튜립을 섞은 가운데에 작은 해바라기도 한 송이 넣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데로보고 서 있었다.

제법 어울리는 근사한 꽃다발이 묶어졌다.

꽃다발을 받아 들고 다시 눈오는 거리로 나왔다.

빨간 장미위로 떨어져 내리는 함박눈의 조화가 너무 멋지다.

아주 오래 전에 그녀와 함께 함박눈을 맞으며 밤거리를 걷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우리도 꽃처럼 아름다웠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길가의 젊은이들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꽃다발을 들고 가는 나를 힐끔거렸다.
등뒤로 꽃다발을 감추고 걸었다.

흰머리 위에 하얀 눈이 덮여 나이를 감추어 주는데도 발길이 꼬인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꽃이 예쁘네요.

젊은 택시기사의 인사말이 고맙다 어색함을 메우려고 꽃만 예쁘냐면서 창문까지 열고 흰눈을 보여 주었는데도,

선생님도 멋지네요. 엉뚱한 대답이다.

아마도 운전하는 기사는 펑펑 쏟아지는 눈이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시야가 가려져 귀찮기만 한 모양이다.

웬 꽃이세요?

대문을 열어주는 그녀가 의아한 표정이다.

당신 주려고.

어색하게 내미는 내 손을 보면서 그녀가 별꼴 다 보겠다는 퉁명스런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엔 홍조가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하고 평생 처음으로 받아 보는 꽃 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오늘 그녀에게 안개꽃에 묻힌 장미꽃다발을 선물한 것은 순전히 첫눈이 함박눈이었던 덕분이다.

환한 얼굴을 보면서 돌아오는 그녀 생일에는 나이만큼 큰 장미다발을 선물하리라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