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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어 보았다. 상큼한 바람과 함께 비릿한 물 냄새가 왈칵 다가온다.

늦더위에 지쳐 있는 오늘은 빗소리가 마치 오래 기다리던 고향 친구처럼 반갑다.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니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창틀에 턱을 고였다.

가로등 불빛 속으로 내려앉는 소낙비가 숫자를 헤어도 될 만큼 환하게 보이는 것이 잘 만들어진 분수대처럼 아름답다.

멋진 야외 공연장에 홀로 앉아 있는 황홀한 기분이다.

우르릉 쾅 번개가 지나간다. 어둠 속에 고요히 묻혀 있던 골목이 꿈속처럼 지나간다.

슬레이트 지붕이 위며 가로수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태고의 숲 속에서 들리는 듯 신선하다. 아니 잘 조화된 오케스트라 연주같이 들린다.

자연은 참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이다. 계절 따라 각기 다른 비다.

아니 똑같은 비라도 내리는 장소 따라 각기 다른 뜻을 만들어 낸다.

소록소록 내리는 봄비가 그리움을 만들어 준다면 스산하게 내리는 가을비는 슬픔을 만들어준다.

겨울비는 사람을 움 추러들게까지 한다.

오늘밤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는 어떤 화음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황홀한 노래 소리로 내 가슴을 적셔준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비에 대한 추억이 많다.

비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참으로 고마운 자연이었다.

때문에 나는 참 많이 맞았던 기억이 난다. 우산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 이었다.

그때 비는 내게 곧 낭만이었다.

봄날 우물가에 앉아 있는 봉숭아의 꽃봉오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리는 이슬비가 술래처럼 다가와 볼을 간질거리면 기다리던 친구가 찾아 온 것처럼 반가웠다.

더위에 지친 여름날 한 두름의 소나기는 피하지도 않았다.

웃통까지 벗어 던지고 쫓아나가 온 들판을 휘고 쏘다녀도 감기는커녕 키가 한 뼘씩이나 쑥쑥 자라나는 듯 온몸에 힘이 잡혀왔다.

사춘기가 되면서 이유 없는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 올 때쯤 나는 더 많은 비를 맞았다.

우산도 없이 속옷까지 흠뻑 젖어서 헤매고 나면 오히려 마음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집에 들어와도 나무람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갈아입을 옷 따위는 걱정 할 필요도 없었다. 흉볼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맨 몸으로 시원한 마룻바닥에 그냥 누워 버리면 스르르 졸음이 몰려온다. 한여름 무더위쯤은 간 곳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철이 들 무렵 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새벽녘까지 온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빗속을 걸어다닌 적도 있었다.

세상 천지에 보이는 것 하나 없이 들리는 빗소리 속에서 왜 그렇게 외로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날밤 물안개 속으로 보이는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각인된 비의 기억이다.

가끔씩 번득이는 번개 속으로 보이는 오늘밤의 풍경이 그 날밤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어린 날처럼 벌떡 일어나 비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없다.

으스스 한기가 몰려온다. 그러고 보면 이제 내게 낭만이나 멋 따위는 사라져버린 것인가?

나이 탓일 것이다.

아니 비속으로 뛰어 든다고 내가 그리워해야 할 낭만이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며 세파에 찌든 내 삶의 답답한 마음이 풀릴 리도 없을 것이다.

물안개 속으로 밤을 하얗게 새우며 비를 맞던 그 밤이 진정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