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들어 매사가 시들해지면서 알 수가 없는 짜증까지 모락모락 일어 난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좀더 근사한 일이 없을까? 그러다가는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몰려오면서 별일도 아닌 일에 신경질이 벌떡 일어난다. 도시 나 자신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개나리 망울이 보일 때 진달래 구경을 가고 싶었고 진달래를 보고 나니 동백도 보고 싶었었다. 한데도 금년에는 꽃구경은커녕 먼 산에 보이는 아지랑이조차 권태롭다. 아무래도 내 마음속에 병이 생긴 모양이다.
무엇 때문일까? 내 나름대로 고민을 해 보았다. 무력증에 걸린 모양이다. 나이 먹어 단조로워진 일상의 권태 때문이라면 털고 일어나야 한다. 마음을 다잡아먹어 보았다.
여행이라도 한번 다녀올까? 막상 여행을 생각하고 보니 당장 가야할 마땅한 곳이 없다. 사실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은 있었다. 군대생활을 했던 강원도다.
하지만 그쪽은 짬을 내지 못해서 지금껏 미루어 두고 있었다 이 참에 눈 딱 감고 다녀올까? 순간 부대 앞산의 정경이 떠오르면서 골짜기로 흐르던 계곡 물까지 눈에 선하게 보인다. 울컥 그리움이 밀려온다. 부대 앞에 있던 작은 빵집이며 중국집은 그대로일까?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곳에 누가 있어 나를 반겨 줄 것인가? 불안감까지 몰려온다.
해외여행? 그건 너무 버겁다. 그러고 보니 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도 저도 아닌 그냥 다람쥐 쳇바퀴처럼 또 항상 다니던 골목이나 어슬렁거리는 것이 내게는 맞는 일상일 뿐인 것이다.
동창회 사무실에 들러보았다. 이곳에 와본지도 반년이 넘었다, 삭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항상 웃음만 있었던 기억인데 오늘은 화투를 치는 친구들도 없이 삭막하다.
술을 마셔도 좋았고 싸움질을 해도 즐거웠다. 주위 사람들도 부러워했는데 지금은 모두 어디 가버리고 이렇게 썰렁한가? 작은 탁자에서 친구 두 녀석이 바둑을 두고 있다.
여전하구나. 우리 둘뿐이다. 환갑 진갑 다 넘은 놈들이 무슨 힘있어서 기어 나오겠냐? 그러고 보면 나만 병이 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애경사 다 끝나면 동창회도 필요 없는 모양이다. 바둑두는 녀석의 푸념에 괜히 등이 스멀거린다. 서성거리다가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할 일없이 월명산으로 올라가 본다. 산책을 하기에 좋은 날씨다. 상큼한 봄바람이 볼을 간질거려 준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중턱에 노란 개나리가 환하게 웃는다.
봄이 오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봄을 기다리던 내 마음 속의 낭만은 어디로 간 것일까? 뭔 곳 여행은 그만 두고 월명산이라도 자주 올라 왔어야 한다.
앞에서 예쁜 소녀 두 명이 팔을 낀 채 앞서 걷는다. 소녀가 한 손으로 개나리가지를 꺾어들고 까르르 웃는다. 다른 소녀도 따라서 허리를 비틀며 웃어댄다. 무엇이 그리 재미가 있을까. 사춘기의 소녀들은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사춘기? 그렇다면 나는 노춘기가 맞는 모양이다. 나는 뻥 뚫린 가슴으로 그렇게 허탈하게 산자락에 서 있었다.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오래도록 마음이 허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