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나다니는 골목에 간판도 없는 철물점이 하나있다. 서너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점포다. 값나가는 물건은커녕 잡동사니 몇 개만 대롱거린다. 키 작고 깡말라 볼품 없는 영감은 방탄유리처럼 두꺼운 안경을 쓰고 앉아서 태평이다.
조는 것 같이 앉아있는 영감은 발소리만 듣고도 나를 알아본다. 사실은 지난 겨울까지만 해도 영감과 나는 서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이 골목으로 이사를 온 것이 이십 년 전인데 그때도 있었던 가게였으니 영감과 나는 친해져도 벌써 친해졌어야 옳았다.
한데 서로 개 닭 보듯 했던 것은 순전히 내가 영감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영감이 나보다 나이도 위고 또 먼저 살고 있었으니 당연히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한데 그것이 번번이 묵살을 당한 것이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내가 목례를 할 때마다 무시를 당하다 보니 나도 화가 났다. 급기야 필요한 물건이 있어도 먼 쪽에 있는 다른 가게를 찾아 나서고 말았다. 그것이 순전히 내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지난 겨울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마침 함박눈이어서 나는 낮부터 한잔 술에 취하고 말았다. 들뜬 기분으로 철물점 앞을 지나다가 영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았다. 만주 독립군들이나 입었음직한 너절하고 빛 바랜 국방색 코트를 걸치고 심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더 웃기는 것은 안경 위에 눈이 수북하게 쌓여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는데도 고개를 쳐들고 열심히 쏟아지는 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얼큰한 내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낭만이 있는 정경이었다. 장난기로 해서는 영감이 앉아 있는 의자라도 빼는 척 하고 싶었지만 청승맞은 영감이 보기 싫어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당신은 누구여? 한데 영감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십 년이나 이 앞을 지나 다녔는데 모른다고 할 겁니까? 볼멘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말야 코앞까지 얼굴을 대주어야 알아 볼 수 있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앞 건물에 사는 사람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찡해져서 말이 더듬거려졌다. 라 사장이구먼. 성함은 들어서 알고 있는데 얼굴을 몰라. 나는 미안한 마음에 영감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하면서 보이지도 않는데 무얼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마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헤어보고 있다고 했다.
비록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해도 행복하게 보이는 영감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발길을 돌렸지만 다음날부터 영감과 나 사이는 갑자기 가까워지기 시작을 했다. 영감은 내 발소리만 들어도 반갑게 손을 들어주었고 나는 일부러 영감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를 하기까지 했다.
추위가 가고 봄볕이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노란 개나리가 담 장을 타고 오르자 영감은 또 가게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눈송이 숫자를 헤어 볼 일도 없는데 무슨 일로 또 앉아 있을까? 나는 영감에게 다가가면서 정겹게 물었다. 영감님, 오늘은 무얼 보시고 계십니까? 아지랑이를 보고 있지. 또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아지랑이가 뜨기에는 철이 이르다. 내 마음속에 보이기 시작을 했으니 이제 곧 뜰 거야. 아! 영감의 눈길을 쫓던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멀리 월명산 앞자락에 연기처럼 가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했던가? 눈이 보이지 않는 영감은 귀로 들어서 내 걸음 소리만으로도 알아보더니 이제는 가슴으로 아지랑이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