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군에서 제대를 하고 실업자로 빈둥댈 때 하루해를 보내기가 지루하고 따분한 적이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몇몇의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점심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낀 건 뱃속이 허전해서였고 오후에는 주머니까지 비어 그 흔한 대폿집 문 앞마저 마음대로 넘어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었지만 일할 곳이 없었다. 오라는 곳도 없었고 찾아 갈곳도 없었다. 세월을 팔아서 돈을 준다면 몇 년쯤 나이를 떼어서 팔고도 싶었고 돈을 많이 벌 수만 있다면 몸쪽 어디 한군데를 떼어내도 좋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창피하기도 했다. 하릴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보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모두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도망가듯이 숨어들어 찾아가는 곳이 극장이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픈 다리와 함께 시간을 잡아먹기 위해서였다.
돈을 아끼려고 변두리 조조 할인하는 삼류극장을 찾아가는 아스팔트 길 위에 쏟아지는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자연히 영화는 뒷전이고 어둠 속에서 졸다 말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천국이다. 천정에 대형 선풍기가 바람을 내준다. 쏟아지는 뜨거운 햇빛 속보다는 훨씬 시원하다. 전날 밤 모기 극성으로 설친 잠을 보충하다보면 옆 사람들까지 한 방죽 고기라 창피 할 것도 없다.
변소간에 숨으면서까지 재탕을 하고 나와도 오뉴월 긴긴 해는 중천에 떠 있다. 붉은 해가 월명산 너머에 걸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루해가 지긋지긋하게 지루했다.
누가 회갑잔치를 한다고 하면 지겨워서 어떻게 그 많은 세월을 살았냐고 묻고 싶었다. 하다 보니 사는 것이 지겨워서 굵고 짧게만 살겠다고 버둥거렸는데 그 긴 세월 다 지나고 어느새 내가 환갑 진갑이 다 지나버렸다. 그 지겹고 길기만 하던 하루해가 이제는 오히려 눈깜짝이다.
누가 세월을 화살 같이 흐른다고 했던가? 봄볕 따가워 진달래 구경 가자고 할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단풍잎 바람에 날리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세월이 아쉽다. 내가 세월투정을 하고 있었더니 얼마 전 명퇴 한 친구가 행복한 소리 그만 하라고 투정을 했다.
어느 세상에나 긴긴 해는 있게 마련이란다. 현직에 있을 때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조차 부러웠었다. 명퇴를 하고 일할 나이에 쫓겨난 지금은 길가를 서성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요, 박 포 장기훈수도 한 두 번이란다. 다방에서 커피 한잔으로 노닥거리는 것도 그 바닥에 이골이 난 사람의 몫이고 복덕방 고스톱도 터 닦은 사람들의 자리였다.
오라는 곳도 갈 곳도 없는데 주머니 사정까지 시원찮고 보면 하루해가 몸살이 나게 길기만 하다는 것이다. 젊은 날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해가 저물면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조금 나은 편이란다. 갈곳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없는 노숙자들이야말로 세월 까먹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란다. 극장 아니라 인생을 조조할인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젊은 날 한때 조조할인은 그래도 행복했던 것일까? 이제 조조할인 극장도 없어진 세상에 하루해가 길어지면 무엇으로 석양의 노을을 아름답게 쳐다 볼 수 있을지 걱정이다.
